그라나다에서 알리칸테로

2026. 6. 9. 15:04슬기로운 은퇴생활 A to Z/한달살기 여행의 기록

4.17 그라나다를 떠나는 아침은 유독 차분했습니다. 끊임없이 물소리가 흐르던 알함브라의 궁전을 내려와,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알리칸테(Alicante)를 향해 길을 잡았습니다. 자동차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창밖의 풍경은 이슬람의 짙은 색채를 조금씩 걷어내고, 지중해 특유의 활기차고 눈부신 햇살을 채워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의 중간 기착지는 '무르시아(Murcia)'였습니다. 거쳐 가는 경유지였기에 오랜 시간을 머물지는 못했지만, 잠시 차를 멈추고 숨을 고르기에 무르시아는 더없이 아늑한 도시였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짝 마른 대지와 그 사이로 흐르는 세구라 강, 그리고 고풍스러운 성당들이 조화를 이룬 풍경 속에서 남은 길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듯 목적지 자체가 주는 감동만큼이나,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를 이어주는 이름 없는 길목에서의 짧은 휴식이 더 깊은 기억으로 남을 때가 있습니다. 삶도 어쩌면 커다란 성취와 성취 사이, 그 지루하고 평범한 '경유지' 같은 시간들로 채워져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몇 시간을 더 달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지며 지중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해안 도시 알리칸테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척박하고 비장했던 내륙의 풍경을 지나 마주한 푸른 바다는, 마치 오랜 여행에 지친 우리를 가만히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향한 곳은 알리칸테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 중 하나로 꼽히는 '에스플라나데 데 에스파냐(Explanada de España)'였습니다.

산책로에 들어서는 순간, 발밑에 펼쳐진 독특한 바닥 문양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빨강, 파랑, 흰색의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 무려 650만 개가 정교하게 박혀 있는 이 길은, 마치 바다의 파도가 육지 위로 밀려와 잔잔하게 넘실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리석 파도 위를 사뿐히 걸어가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가벼워졌습니다.

길 양옆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야자수들이 울창한 터널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로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쳤습니다. 사방에서는 현지인들의 낮은 말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거리 악사의 낭만적인 선율이 한데 어우러져 흐르고 있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동행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뜨거운 스페인 태양 아래 거친 일정을 함께 소화하느라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미소 짓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푸른 빛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50대말의 나이에 떠나는 여행이 젊은 날의 여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 눈에 비친 풍경보다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더 깊이 살피게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물결치는 길 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목적지도 두지 않은 채, 그저 함께 걷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해질녘의 산책을 마치고 나니 기분 좋은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딱히 대단한 맛집을 찾아 헤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가게에서, 갓 구워져 나온 따끈한 피자 한 판을 주문했습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도우 위에 치즈가 부드럽게 녹아내린 소박한 피자였습니다. 화려한 코스 요리도 아니고 스페인 전통 음식도 아니었지만, 한 조각을 베어 물어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을 느끼는 순간, 낮 동안 쌓였던 온몸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우리는 오늘의 여정에 대해, 그리고 내일 마주할 새로운 풍경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행복이란 그리 거창한 곳에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치열했던 하루의 끝에 신뢰하는 이들과 마주 앉아 따뜻한 음식 한 접시를 나누며 부딪치는 잔, 그리고 서로를 향해 짓는 편안한 미소.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아니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확실한 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창밖으로는 알리칸테의 밤바다가 검푸르게 깊어가고 있었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우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그라나다의 치열했던 역사적 비장함에서 벗어나, 지중해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온전한 쉼을 얻었던 알리칸테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따스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